사회와 구조

미련하게 책임지는 자의 사회, 그 끝은?

quietinsight 2025. 5. 23. 17:58

 

 
요즘 세상은 똑똑해야 산다고들 한다. 그 '똑똑함'의 기준은 빠르게 손절할 줄 알고, 남 탓을 잘하며, 무리하게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책임지는 사람은 종종 무모하다 여겨지고, 때로는 이용당하며, 대체로 손해를 본다. 그러니 자연스레 우리는 묻는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이 질문은 냉소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대의 방향을 드러내는 신호다. 지금 이 사회는 '책임을 지려는 사람'을 대우하기는커녕, 그를 미련하다고 조롱하는 구조로 흘러가고 있다.
 
전쟁 영화나 실화 기반 다큐를 보라.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이들의 행동은 결과와 무관하게 존중받는다. 그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감수하고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이유로 기려진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그러한 결단은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곧장 비난의 대상이 된다. 왜 그렇게 나섰냐는 말과 함께.
 
실제 역사 속에서도 책임을 감수한 결단이 존중받는 사례가 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는 군부와 강경파의 압박 속에서도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 해상봉쇄라는 절충책을 선택했다. 만약 이 결정이 실패로 돌아갔더라면, 그는 무능한 지도자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위험을 감수했고, 결과적으로 핵전쟁을 막았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책임지는 리더십'의 상징으로 남는다.
 
반면 현대사회에선 책임 있는 결단이 오히려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 일부 지자체장이나 공공기관 책임자들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대중의 반발이 예상되는 결정을 감수했다. 그러나 결과가 완벽하지 않거나 비용 부담이 큰 경우, 이들은 공익을 위한 선택을 한 사람이라기보다, 무능하거나 경솔한 인물로 낙인찍히며 여론의 표적이 되었다. 책임 있는 행동조차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풍조 속에서, 과연 누가 기꺼이 책임을 지려 하겠는가?
 
실패해도 책임지려는 태도는 더 이상 칭찬받지 않는다. 결과 중심의 문화 속에서, 실패는 '어리석음'과 동일시된다. 책임은 결과에 따라 정당화되며, 용기 있는 결정은 결과가 나빠지면 무모한 선택이 된다. 이러한 구조에서 누가 진심으로 책임지려 할까?
 
책임을 감수한 사람에게 결과가 나쁘면 돌아오는 말이 있다. "그러면 잘 하지 그랬어." "잘 하면 됐잖아" "책임진다면 비난도 감수해야지" 이 말은 얼핏 논리적인 비판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책임 있는 태도에 대한 조롱에 가깝다. 실패했다는 이유로 그 결단 자체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태도는, 결과가 좋을 때만 책임이 의미 있다는 왜곡된 인식을 드러낸다. 이런 논리 속에서는 성공한 책임만이 존중받고, 실패한 책임은 어리석음으로 낙인찍힌다.
 
책임지는 태도가 조롱당하는 구조에서 과연 누가 진심으로 책임지려 할까?
 
물론 책임을 진 사람이라도 그 결정이 무책임했거나 예측 가능한 오류였다면, 사회는 정당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책임은 면책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는, 모든 실패를 무조건 조롱하거나 낙인찍는 풍조에 있다. 책임지는 태도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신중하고 구조적인 분석에 기반해야 한다. 비판은 공동체의 성찰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자신은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으면서 책임자를 조롱하기 위한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된다.
 
문제는,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는 결국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회피가 미덕이 되면, 의사결정은 느려지고, 협업은 붕괴되며, 공동체는 공허한 약속의 집합이 된다. 그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책임감을 가진 소수다. 손해만 보고, 존중은커녕 조롱당하며, 소진된다.


자유로운 사회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책임을 존중하는 사회여야 한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자유가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할 때다. 단기적인 생존이 아닌, 장기적인 존엄을 위한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그때 비로소 책임지는 자는 더 이상 미련하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