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들

유시민이라는 불편감 — 기대에서 어긋난 언어의 힘

quietinsight 2025. 5. 26. 19:24

처음 ‘유시민’이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그가 남긴 항소이유서 형식의 글을 통해서였다. 투박하지만 날 선 논리, 체제에 대한 분노와 자부심이 얽힌 그 문장들 속에는 ‘패기와 악으로 똘똘 뭉친 지식인의 얼굴’이 있었다. 이후 그는 작가, 정치인, 해설자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오가며 복잡한 사회 현안을 유려한 언어로 해설해주는 ‘시민의 선생님’ 같은 인물로 자리잡았다. 나는 그를 존경했고, 그의 언어는 신뢰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인상은 서서히 변해갔다. 특히 조국 전 장관과 관련된 논란을 기점으로, 그는 더 이상 해설자가 아닌 정파적 옹호자의 모습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검찰 쿠데타", "기득권 언론의 야합", "조국은 검찰개혁의 상징"이라는 표현은 그가 여러 방송과 칼럼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구호들이었다. 그는 조 전 장관의 혐의 자체보다는 검찰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며 사건의 본질을 정치적 프레임으로 덮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사회적 맥락에 따라 입장이나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그 변화가 성찰에서 비롯된 진화인지, 아니면 진영 논리에 충실한 전략적 전환인지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지식인이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해온 이가, 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은 채 프레임을 무기로 삼기 시작하면, 그것은 해설이 아니라 선동으로 변질된다. 유시민에게서 느껴지는 불편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가 처음 사용했던 ‘합리적 의심’이라는 표현은 한때 신선하고 인상적이었다. 감정적 비난을 배제하고, 이성적 회의로 사안을 접근하는 태도는 세련돼 보였고, 기존 권력기관에 대한 비판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 표현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자주, 더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결국 그 말은 ‘불리하면 의심하고, 유리하면 신뢰하라’는 식의 선택적 해석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다. 처음엔 통찰이었던 언어가, 점차 어떤 사실도 정치적 동기로 재구성할 수 있는 프레임의 매개가 되면서, 실망은 더 깊어졌다.

그의 말은 여전히 유려하고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누구를 위해 말하는가”가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신뢰는 언어의 미사여구가 아니라, 그 언어가 기초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더 이상 ‘시민의 선생님’이 아니라 ‘정치의 방패’에 가깝게 보인다.

그의 변화는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전,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징후를 보였다. 당시 그는 보수 세력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커지던 분위기에 편승해, 스스로를 ‘어용 지식인’이라 칭하며 정치 진영의 편에 설 것을 선언했다. 그 결정은 당시에는 진영의 위기에 대응하려는 충정으로 읽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비판적 거리두기’를 포기하고, ‘정치 논리의 대변자’로 자신을 위치 지운 출발점이 되었고, 그는 더 이상 해설자가 아니라 무대 위에 선 선전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감당하지 않은 것은 그 변화에 대한 설명 책임이다. 말이 바뀔 수는 있다. 그러나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변화를 납득 가능하게 설명할 의무 또한 져야 한다. 설득은 논리보다 태도에서 오고, 신뢰는 입장의 일관성보다 변화에 담긴 자기 고백에서 비롯된다. 유시민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고, 그저 말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 간극이 쌓이며 남는 것은 설득의 상실, 그리고 점점 커지는 불편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