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는 점점 조용해진다. 아니, 조용해지기를 강요받는다. 층간소음, 공놀이 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그리고 1년에 한두 번 있는 운동회의 환호성조차 이제는 '불편함'의 이름으로 민원이 되고, '공공의 사과'로 시작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최근 학교 운동회는 많은 곳에서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학부모 참여는 줄고, 사과 방송으로 시작되는 행사도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함께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민원, 다른 부모와 비교된다는 심리적 부담, 그리고 '시끄럽다'는 소음 민원. 아이들의 하루짜리 축제조차 이 사회는 '참기 어려운 소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부 학교에서는 운동회 대신 실내 체육활동으로 대체하거나, 외부 확성기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2022년 서울 모 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 민원으로 인해 운동회를 전면 취소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아이들의 사회적 성장 기회를 제한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과연 이것이 진보이고 진화일까? 선진국일수록 조용한 사회를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배려와 공존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다. 예컨대 독일, 스위스 등 유럽 국가들은 저녁 이후 조용한 환경을 엄격히 규제하지만, 대신 낮 시간 동안의 생활 소음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와 관용이 존재한다. 한국은 오히려 그 반대의 흐름을 보인다.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서 '조용함'이 절대적 가치로 취급되면서, 공동체적 소리조차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조용함은 공존의 결과가 아니라, 타인을 견디지 못하는 개인화된 사회의 반영이다. 우리는 이제 '내가 불편하니 모두 멈추라'는 감정적 민원에 집단이 휘청이는 사회에 살고 있다.
물론 소음에는 분명 기준이 필요하다. 밤늦은 공사, 고의적 층간소음 같은 악의적인 방해는 당연히 규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운동회, 농구공 튀는 소리, 아이들 웃음처럼 일시적이고 불가피한 생활의 소리들마저 모두 문제 삼는 것은, 사실상 공동체가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불편해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이쯤 되면 묻고 싶다. 도심 한복판에 살면서 아이들이 낮 시간에 뛰어노는 소리조차 감당할 수 없다면,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결국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나는 어느 정도의 불편을 공동체와 함께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만약 그 대답이 "아무것도 감수할 수 없다"라면, 우리는 이미 도시가 아닌, 개인의 고립된 섬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섬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도시는 본래 살아 있는 공간이다. 낮에 운동회가 열리고, 아이들이 뛰놀고, 이따금 웃음과 응원 소리가 들리는 곳. 그 활기와 생명력을 "불편"이라는 이름으로 지워가는 사회는 결국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미안하지만, 네가 존재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 피해야."
공존은 타인의 존재를 견디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조용한 사회보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조금은 시끄럽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실천이 필요하다. 첫째, 일시적 생활 소음에 대한 사회적 기준과 합의를 명확히 하고, 둘째, 공공기관과 학교는 감정적 민원에 휘둘리기보다 공론화와 설명의 과정을 통해 공동체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셋째, 우리 각자도 타인의 삶을 감내하려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진짜 문제는 소음이 아니라, 서로를 감당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이다. 그 조용함이 배려가 아닌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진화가 아니라 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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